자카르타에 머무르던 기간은 우연히 라마단(Ramadan)과 겹쳤다.
이슬람의 금식 성월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내 일상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무슬림도 아니고, 그들의 종교 의식에 참여할 일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막상 자카르타에 머무르며 며칠을 지내보니
라마단은 특정 종교인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리듬과 분위기를 송두리째 바꾸는 강력한 문화적 흐름이었다.
아침이 조용해지고, 점심에 문을 닫는 식당이 늘어나고, 해 질 무렵이 되면 거리는 조용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내가 라마단을 체험하지 않았더라도, 도시가 라마단 속에 들어가 있었고,
그 안에서 나는 조용히 함께 걸어가는 사람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점심 없는 하루 – 닫힌 식당, 굶는 여행자
라마단 기간에는 해가 떠 있는 동안 무슬림은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
그 영향은 관광객에게도 꽤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자카르타 중심지의 수많은 식당과 카페들이 라마단 기간에는 점심 영업을 하지 않거나,
영업을 하더라도 창문에 커튼을 치고 조용히 운영한다.
처음에는 "왜 식당이 이렇게 많이 닫았지?" 싶었고,
배가 고파서 찾아간 음식점마다 문이 닫혀 있어
혼자서 '무슬림이 아닌 나는 먹을 수도 없나?' 싶은 착각도 들었다.
사실 외국인도 이용할 수 있는 식당은 있었지만,
그마저도 조심스럽고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해야 하는 문화적 긴장감이 있었다.
음식은 단순한 생존 수단이 아니라,
종교적 예절을 침범하지 않기 위한 행동으로 바뀌어 있었다.
해 질 무렵, 도시가 깨어나는 시간
오후가 지나고,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도시는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금식을 마치고 식사하는 ‘이프타르(Iftar)’ 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일제히 식당, 길거리 포장마차, 푸드코트로 향한다.
조용했던 거리엔 갑자기 수많은 사람과 차량이 몰려들고,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도시 전체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풍경은 마치 ‘저녁 러시아워’라기보다 축제와 해방이 결합된 일상의 축소판 같았다.
사람들은 첫 한 모금의 물, 한 입의 대추야자를 마주하며
하루 동안 참아온 갈증과 허기를 달래고,
그 과정에서 정신적인 충족감까지 함께 공유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외국인인 나로서는 그 분위기 속에 완전히 섞일 수는 없었지만,
그들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이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리듬이 맞춰지는 묘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기다림’과 ‘절제’가 기본값이 되는 한 달
라마단은 단순히 금식을 하는 달이 아니다.
음식을 넘어서, 행동, 말, 감정까지 절제하는 시간이다.
낯선 여행자인 내가 보기에도
사람들은 라마단 기간 동안 더 차분했고,
거리에서 다툼이나 소란스러운 장면은 거의 보기 어려웠다.
버스 안도 조용했고, 상점에서도 말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
‘배가 고파서 예민할 법도 한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처음엔 의아했지만, 곧 라마단의 의미를 생각하게 됐다.
먹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고,
하루를 ‘기다림의 시간’으로 채우는 사람들이 많아졌던 것이다.
이 절제와 인내의 문화는 여행자에게도 조용한 존중을 요구했고,
그걸 깨닫게 되면서 나도 조금씩 말투를 낮추고, 행동에 여유를 두게 되었다.
종교적 의례가 아니라 도시의 리듬
며칠 뒤, 나는 자카르타가 ‘라마단을 지내는 도시’가 아니라
‘라마단 안에서 살아가는 도시’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됐다.
이슬람 신자가 아니더라도, 라마단의 흐름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되고,
그 흐름에 맞춰 걷고, 먹고, 기다리는 감각이 몸에 스며든다.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그 도시에서 지내는 것만으로도
라마단을 함께 체험하고 있는 셈이었다.
조용한 아침, 굶주린 오후, 활기찬 저녁…
그 리듬 속에서 나는 단순한 여행자를 넘어
그들의 시간 안으로 잠시 들어가 있던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단순한 여행의 일부가 아니라
내가 이 도시에서 배운 방식 중 가장 깊이 남는 문화적 감각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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