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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충격 시리즈

영국인의 사과 예절 – “Sorry”의 진짜 의미는 뭘까?

by daon-nuri 2025. 4. 23.

런던에 도착한 첫날, 나는 지하철에서 실수로 누군가의 어깨에 가볍게 부딪혔다.
본능적으로 “Sorry”라고 말하려던 찰나, 먼저 상대방이 나에게 “Oh, sorry”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당황스러웠다.

부딪힌 건 나였는데, 왜 상대가 먼저 사과를 할까?


그 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가벼운 스침, 길에서 서로 방향이 겹쳤을 때, 버스 안에서 자리 양보를 못 했을 때 등.

 

영국에서는 상황의 잘잘못과 관계없이 “Sorry”가 일상적으로 오간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들의 사과는 단지 미안함을 전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감정을 조절하거나, 대화를 부드럽게 마무리하거나, 혹은 단순히 침묵을 깰 때조차도 사용되는 만능 표현 같았다.


이 글에서는 여행자로서 경험한 영국식 “Sorry” 사용법과 그 안에 담긴 의미, 분위기, 의사소통 방식을 함께 들여다보려 한다.

 

영국인의 사과 예절

 

“Sorry”는 죄송함보다불편을 인식한다는 신호

 

영국에서 “Sorry”는 누군가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책임을 지는 말이라기보다,
상대에게 불편을 주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선제적으로 인지하고 있다는 표현에 가깝다.


예를 들어 좁은 복도에서 누군가 지나가길 기다릴 때,
혹은 계산대에서 잠시 동작이 느려졌을 때,
“Sorry”
는 마치잠깐 방해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걸 알아채고 있어요라는 의미로 작동한다.

 

이런 맥락에서 “Sorry”상대의 감정을 미리 진정시키는 예방적인 대화 방식이기도 하다.
특히 갈등이 일어날 만한 상황을 회피하거나, 감정이 부딪히지 않도록 완충장치를 놓는 역할을 자주 한다.
그래서 때때로 사과가 너무 쉽게 오가고, 정작 상황이 심각하지 않아도 “Oh, sorry”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그걸 처음에는 과도한 사과처럼 느꼈지만,
사과의내용보다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면서 영국식 Sorry는 예절보다는 기술에 가까운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끝에 붙는 “Sorry”는 말보다 깊은 눈치의 언어다

 

“Excuse me”라고 할 상황에도 “Sorry”를 쓰는 게 영국에서는 전혀 어색하지 않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질문을 하려는 순간에도
“Sorry, do you know what time it is?”
혹은
“Sorry, can I just ask you something?”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대화를 많이 접할 수 있다.

 

이럴 땐 진짜 미안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공간이나 시간을 조금이라도 침범하는 걸 인식하고 있다는 사려 깊음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Sorry”가 사용된다.


말을 걸 때, 물건을 건넬 때, 심지어 이메일을 보낼 때조차 "Sorry for bothering you" 같은 표현은 거의 기본처럼 쓰인다.

이런 표현들은 영국 사회에서사과가 감정 표현이기보다는, 서로가 불편해지지 않기 위한 일종의 예측 가능한 신호라는 걸 보여준다.


내가 너를 방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식하고, 그걸 말로 먼저 차단하는 것.
그게 바로 “Sorry”의 핵심 기능이다.

 

진심으로 사과할 땐 오히려 “Sorry” 대신 설명이 나온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잘못을 했을 때 영국인들은 “Sorry” 한마디로 끝내지 않는다.
그보다는 구체적인 설명이나 맥락을 함께 이야기하며 진심을 보여주는 방식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예를 들어 약속을 잊거나, 실수로 큰 불편을 끼친 경우에는
“I’m terribly sorry I missed your call. I was in a meeting and completely lost track of time.”
이런 식으로 상황과 감정을 담은 문장이 함께 등장한다.


, ‘Sorry’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는 문화가 역설적으로 “Sorry”가 너무 자주 사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단기 체류자 입장에서는 영국인의 “Sorry”때론 너무 가볍게 들리고, 때론 너무 무겁게 다가오는 순간이 공존한다.


그 차이를 이해하려면 말 자체보다는 그 말이 쓰인 상황, 말하는 사람의 표정, 그리고 대화의 흐름 전체를 함께 읽는 시선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