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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충격 시리즈

말은 친절한데 속마음은 안 보인다 – 영국인의 완곡 화법

by daon-nuri 2025. 4. 22.

영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사람들의 첫인상은 꽤 인상 깊었다.


거리를 지나치며 건네는 인사도 부드럽고,
슈퍼마켓 계산대에서도 “How are you?”라는 말로 가볍게 말을 건네는 점원들이 인상적이었다.
공손하고, 조용하고, 침착한 그들의 말투는 처음엔 상당히 친절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말투가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말은 분명 긍정적으로 들리는데, 정작 그 안에서 진심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영국에서는예스라고 말했지만 그게 정말예스인지,
혹은 “Not bad”라는 표현이 정말 괜찮다는 뜻인지 헷갈리는 순간들이 자주 있었다.


완곡하고 간접적인 화법이 기본값으로 작동하는 사회에서,
말의 겉과 속이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하는 순간이 잦아졌다.

 

이 글에서는 영국에 단기 체류하면서 마주했던 완곡한 말투의 문화,
그리고 그 말투 속에 담긴 사회적 배경과 의도를 정리해보려 한다.

 

직접 말하지 않는 것이 예의인 나라

 

영국에서는 대화할 때 직접적인 표현을 최대한 피하는 것이 예의로 여겨진다.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의 일환이기도 하고,
대화를 부드럽게 이어가기 위한 문화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대신,
“Interesting idea”
혹은 “I'll think about it”처럼 명확하지 않지만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표현으로 정리하는 경우가 많다.

 

직장 내 회의에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자주 경험할 수 있다.
한국식으로라면이건 비효율적입니다라고 말할 만한 상황에서도
영국에서는 “There might be a more effective way”처럼 돌려 말하면서도 본질은 건드리지 않는 방식이 기본이다.

 

처음에는 오히려 이런 말투가 더 정중하게 느껴졌지만상대방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애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 완곡한 화법이 오히려 소통의 장벽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나쁘진 않다가 최고의 칭찬일 수도 있다

 

영국식 화법을 이해하려면, 표현의 의미보다 그 표현이 쓰인 맥락과 말투, 표정까지 함께 읽어야 한다.


특히 긍정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던 말들이 사실은 아주 미묘한 비판이나 거절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Not bad”는 말 그대로나쁘지 않다는 의미지만, 영국에서는 이 표현이정말 훌륭하다의 다른 말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생각보단 괜찮네정도의 약간 애매한 평가로 쓰이기도 한다.

 

또한 “Quite good” 같은 표현은 상황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강조로 쓰이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그럭저럭 괜찮았다정도의 온도 낮은 칭찬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표현들을 외국인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과도한 기대나 오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제안한 아이디어에 대해 “Interesting…”이라는 반응이 돌아왔을 때,
처음에는 좋은 의미로 받아들였지만, 나중에 돌아보니 그 말은 그냥 정중하게 넘기기 위한, 일종의 정지 표지판 같은 표현이었다.

 

부드러움 속에 숨은 거리감

 

말투가 정중하다고 해서, 반드시 친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영국인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쉽게 웃고,
‘Please’, ‘Thank you’, ‘Sorry’
같은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하지만 그 공손한 말투가 감정적 친밀감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말의 온도와 관계의 거리 사이에는 아주 정교한 간격이 설정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느 날, 같이 일하던 영국인 동료가 나에게  “Let’s catch up sometime”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곧 만나자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며칠 뒤 정말로 연락을 했더니 그는 조금 당황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때 알게 됐다.
영국에서는 이 말이 약속이 아니라 인사에 가까운 관용구라는 걸.
이처럼 영국의 말은 부드럽지만, 그 안에는 관계의 선을 명확하게 지키려는 태도가 숨어 있다.

영국인의 완곡 화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