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지내다 보면 언어 장벽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바로 '돌려 말하기' 문화다. 말은 분명 들었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고, 분위기를 살피다 보면 나중에서야 ‘거절이었구나’, ‘기분이 안 좋았구나’를 눈치채게 된다.
일본인의 대화 방식은 직설보다는 완곡, 정면보다는 에둘러 표현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이런 문화는 겉으로는 부드럽고 예의 바르지만, 때론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소통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내가 직접 겪은 사례들을 바탕으로 일본의 '돌려 말하기' 문화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 배경에는 어떤 가치관이 숨어 있는지 알아보려 한다.
일본의 말투를 이해하면,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말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일본 생활에서 꼭 필요한 능력이다.
"생각해볼게요"는 정말 생각 중이라는 뜻일까?
한국에서는 누군가가 "생각해볼게요"라고 말하면,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보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이 표현이 거절의 완곡한 방식일 수 있다.
내가 처음 일본 회사에서 일할 때, 팀장에게 어떤 아이디어를 제안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미소를 지으며 "소레와... 한토니 오모시로이 데스네. 수코시 캉가에테 미마쇼우카"라고 말했다.
'정말 흥미롭네요. 조금 생각해보죠.' 라는 말에 나는 내심 기대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다.
나중에야 일본인 동료에게 "그건 그냥 부드럽게 거절한 거야"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일본에서는 직접적으로 '그건 좀 곤란합니다' 혹은 '싫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례한 행동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거절을 할 때에도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애매한 표현을 택하는 것이다.
직장에서 더 강해지는 '돌려 말하기'의 기술
특히 일본의 직장 문화에서는 상사와 부하 직원, 또는 고객과 직원 간의 대화에서 직설적인 언어는 관계를 해친다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한다.
예를 들어,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업무 지시를 할 때조차 "이 일은 ○○씨가 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라든지 "가능하다면 이번 주 안에 끝내는 방향으로..." 같은 말이 자주 쓰인다.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제안처럼 들리지만, 사실상은 "당장 해달라"는 요청인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헷갈렸고, "이건 내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건가?"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일본 직장 생활의 생존 전략이라는 걸 알게 됐다.
상대방의 말보다 표정과 맥락, 상황 전체를 읽는 능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거절보다 피하기, 정답보다 여지를 남기는 화법
일본인에게는 "싫다", "안 된다" 같은 단호한 표현을 쓰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무언가를 거절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다른 표현'을 통해 우회적으로 입장을 전달한다.
한 번은 친구에게 함께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는데, 그 친구는 "그 시기는 아마 바쁠 것 같아... 일정이 좀 애매해서"라고 답했다.
그 말이 나는 가능성이 있다는 뜻으로 들렸지만, 알고 보니 그것은 정중한 거절이었다.
일본인은 말을 '끝내지 않고 남겨두는 방식'을 선호한다.
그 안에는 상대방이 체면을 잃지 않도록 해주는 배려가 포함돼 있다.
이처럼 일본의 화법은 무언가를 확실하게 말하기보다, 오히려 상대가 스스로 눈치채고 받아들이기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물론, 이런 방식은 문화적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외국인 입장에서는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말보다 분위기, 논리보다 공감이 중심인 일본의 대화
일본에서의 대화는 논리적인 설득보다는 분위기와 조화, 그리고 공감의 균형을 중시한다.
내가 의견을 낼 때, "이건 더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이건 잘못됐습니다"라는 식으로 직접적으로 말하면
종종 상대가 얼굴을 굳히거나 말수가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그때 알게 된 것은 일본에서는 옳고 그름보다, 말하는 방식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대신 "이 방향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나 "이런 방법은 어떨까요?"처럼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기본 예절이다.
처음에는 피곤하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문화 속에서도 나답게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은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정답을 주지 않더라도, 상대방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한 말의 기술이 일본의 대화 방식에는 스며들어 있다.
일본인의 ‘돌려 말하기’ 문화 – 진심은 숨기고 눈치로 읽는다
일본인의 돌려 말하기 문화는 단순한 언어 습관이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고 충돌을 피하려는 문화적 맥락 속에서 생겨난 의사소통 방식이다.
이 문화는 부드럽고 평화롭지만, 동시에 해석과 맥락 파악을 필요로 한다.
외국인의 입장에서 처음엔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이 문화에 적응하고 이해하게 되면
일본인과의 대화 속에서도 깊은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무엇보다도, 말보다 말의 의도와 분위기를 읽는 감각이 일본에서는 진짜 ‘언어 실력’이다.
그리고 그 감각은 경험을 통해 서서히 익혀갈 수 있다.
'문화충격 시리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 편의점 현실 -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다 (1) | 2025.04.16 |
---|---|
일본 주거 문화 – 집 안에서도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 (0) | 2025.04.16 |
일본 침묵 예절 – 너무 조용해서 불편했던 순간들 (0) | 2025.04.16 |
일본의 쓰레기 분리수거 – 버리기 전에 공부가 필요하다 (0) | 2025.04.16 |
일본 식당 매너 – 조용한 공간에 깃든 깊은 배려의 문화 (0) | 2025.04.16 |
태국 식사 문화 – 조용하고 정갈한 밥상 뒤에 숨은 문화 (0) | 2025.04.15 |
태국인의 식사 도구 사용법 – 숟가락, 포크, 손의 미묘한 사용 차이 (0) | 2025.04.15 |
태국 전통 음식의 숨겨진 의미와 유래 – 맛 뒤에 담긴 이야기 (0) | 2025.04.15 |